머시리스

프롤로그

카터

“진작 널 가졌어야 했는데.”

첫날이 떠오른다. 자기를 풀어달라며 소리치고 비명을 지르던 아리아. 그때의 나는 아리아를 증오했었고, 아리아도 나를 증오했었다.

힘주어 목을 잡았건만, 내 이런 손길에도 아리아는 온몸으로 반응을 보인다.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간신히 고개를 젓는다.

“아니야.”

중얼대는 것을 듣자 페니스에 힘이 들어간다. 감히 내게 반항하는 이 여자에게 어서 벌을 주라며 아우성친다. 하지만 그 순간 아리아의 말이 이어졌다.

“결국엔 이렇게 될 일이었던 거야.”

그러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고 내 무릎 위에 엎드린다. 이제 아리아는 완전히 내 손아귀에 들어왔다. 부풀 대로 부푼 입술이 어서 내가 가져가 주길 기다린다.

이 모든 것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아리아의 모든 것이 내 것이고, 아리아도 그걸 안다.

다 내 것이다.

1

카터

 

전쟁이 임박했다.

지난 2년간 알고 있던 사실이다.

째깍. 째깍.

시계 리듬에 맞추어 악다문 턱 근육이 움찔대고, 움켜쥔 주먹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한다. 긴장감으로 어깨가 뻣뻣해진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면서 중압감을 날려 버리려 했다.

째깍.

고요한 사무실에 시계추 움직이는 소리만이 울린다. 그때마다 내 안의 분노도 쌓여 간다.

모임에 가기 전에는 늘 이렇다. 특히 이번 모임은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내 피를 더욱더 뜨겁게 끓어오르게 한다.

내 시선이 사무실에 있는 대형 괘종시계에 머물렀다가 시계 옆 선반으로 옮겨 간다. 뒤이어 선반 밑에 놓인 마호가니 나무와 철로 만들어진 궤짝으로 떨어진다. 가로 180센티미터, 세로 90센티미터, 깊이 90센티미터의 궤짝은 고서로 에워싸인 내 사무실 벽과 잘 어우러졌다.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나는 사무실에 돈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저것들은 다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보이는 대로 믿는다. 그러니 나는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내 입맛에 맞게 적절히 이용할 뿐이다. 값비싼 고서, 예술 작품, 귀한 목재로 만든 우아한 가구. 싹 다 개수작이다.

저기 놓인 궤짝을 빼고는.

저 궤짝에 얽힌 이야기는 영원토록 나와 함께할 것이다.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내 인생에서 저 궤짝은 결정적 순간이었다고 정확하게 꼽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추억 중 하나다. 내가 저 궤짝을 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저 궤짝을 내게 넘긴 사내가 해준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하던 사내의 연녹색 눈, 내게 제 이야기를 하며 어물쩍 얼버무리던 태도까지, 어제 일처럼 낱낱이 생생하게 내 기억 속에 박혀있다.

사내는 어린 시절 저 궤짝 덕에 자기가 어떻게 목숨을 건졌는지, 사내를 보호하기 위해 그의 어머니가 어떤 식으로 자기를 궤짝 안에 밀어 넣었는지를 이야기했다.

목구멍이 뻣뻣해지면서 조여드는 듯한 느낌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사내의 장면 묘사가 눈에 선했다.

사내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머니에게 자기가 얼마나 간절히 매달렸는지 이야기했다. 하지만 결국 사내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궤짝 안에서 쥐죽은 듯 고요히 숨어서 자기 어머니가 살해되는 소리를 듣고 있기만 했다.

그런 궤짝을 내게 내놓으며 사내는 제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했다. 사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내 어머니가 죽어가며 내게 작별 인사를 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 사내의 이야기가 썩 감동적이긴 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없이 사내의 머리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사내는 내 돈을 훔치려 했고, 횡령이 들통나자 무슨 빚이라도 갚듯이 궤짝으로 때우려 들었다. 윌리엄은 도둑질에 능했고, 재미있는 이야기꾼이었으나 천하에 멍청한 놈이었다.

남에게 온정을 베풀고 약한 모습을 보여왔으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그날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항상 되새기게 할 징표로, 한때 윌리엄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궤짝을 가졌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되새기기 위해.

이 사무실에서 모임을 가질 때마다 나는 궤짝을 늘 시야 안에 두었다. 이 타락한 사무실에서 범죄자들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거래를 해 나가며 부와 권력을 쌓아가는 동안 나는 궤짝을 바라보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강렬히 되새겼다.

내가 원하는 그대로 이 사무실을 꾸미기 위해 어마어마한 돈을 들였지만, 이 사무실이 불타 잿더미가 되더라도 모두 쉽게 새로 채워 넣을 수 있다.

저 궤짝만 빼고는.

“놈들이 이 일을 끝까지 밀고 나갈 것 같아?”

뒤에서 동생 대니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회상에서 깨어났다.

표정을 수습하는 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나는 턱에서 긴장을 풀고 분노를 감춘 뒤 고개를 들어 대니얼을 보았다.

“전쟁, 그리고 거래. 놈이 진짜로 오늘 밤에 계획을 실행해서 여자를 납치할 것 같냐고.”

대니얼이 질문의 의미를 명확히 하며 다시 물었다.

나는 숨을 훅 뿜으며 웃은 뒤 대답했다.

“놈은 이번 건에 목매달았어. 여자에겐 이미 덫을 놓았고, 일은 진행 중이야. 오래 안 걸려.”

대니얼은 사무실로 천천히 걸어들어오며 뒤꿈치로 무거운 사무실 문을 툭 차서 닫은 후, 내가 앉아 있는 책상 건너편에 와서 섰다.

“그리고 형은 이 일 한복판에 끼려는 거고?”

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핥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리를 펴주었다. 창으로 시선을 돌리고 팔짱을 끼며 책상에 기대어 서는 사이 대니얼이 책상을 돌아 다가온다.

“우리가 이 일 중간에 끼어들 일은 없어. 이건 그 둘 사이의 문제니까. 우리 구역이 가깝긴 해도 우린 빠져 있을 수 있어.”

“행여나! 로마노가 노리는 건 형이 나서는 거야. 로마노는 오늘 밤에 이 전쟁을 개시할 거라고. 형도 알잖아?”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마노를 떠올리기만 해도 로마노의 시가 담배 냄새가 폐를 가득 메우는 것만 같다.

“아직은 취소할 수 있어.”

대니얼의 말에 나는 미간을 구겼다. 저 녀석이 저토록 순진할 리가 없는데.

이제야 비로소 나는 대니얼을 제대로 보았다. 저 녀석이 복귀한 뒤로 처음이다. 대니얼은 여러 해 조직을 떠나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쥔 이 모든 것을 쟁취하기 위해 그 피비린내 나는 나날을 내가 악전고투하며 보내는 동안 저 녀석은 저리 물렁해졌다. 어쩌면 에디슨 탓일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저딴 녀석이 되었는지도 모르지.

“이번 전쟁은 필연이야.”

나의 말은 최종 선언이자 확정이다. 공포와 분노 위에 이 사업을 키워왔고,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시체 쓰러지는 소리가 뒤를 이었지만,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시작한 것은 아니다. 피 묻은 손으로 제국을 세우려면 응당 죽음은 따르게 마련이다.

창가로 좀 더 다가오며 대니얼의 짙은 눈이 가늘어졌다. 나를 봤다가 몇 층 아래 꼼꼼히 관리된 정원을 내려봤다가 한다.

“이 일을 하고 싶은 거 확실해?”

음성이 하도 작아 간신히 알아들었다. 내게 시선을 맞추지 않는 대니얼의 침통한 분위기에 등골이 서늘하다. 팔에도 소름이 돋았다.

몇 년 전 일이 떠오른다. 우리에게 아직은 선택의 여지가 있었고, 그리고 잘못된 선택을 했던 그때가.

끝까지 일을 밀고 나가고 싶은지 아닌지, 그런 것이 그래도 의미 있던 그때가.

“우리 왼편에 사람들이 있어.”

대니얼과 나 사이의 간격을 한 걸음 좁히며 말했다.

”오른편에도 사람들이 있지. 결국엔 어느 한 편을 택할 수밖에 없어.”

그러자 대니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까칠하게 자란 턱수염을 엄지로 문지르더니 다시 나를 보았다.

“그럼 여자는?”

꿰뚫을 듯한 대니얼의 눈빛에서 나는 우리 둘 다 치열하게 싸워왔고 살아남았음을, 지금 이 자리에 서 있기까지 우리 둘 다 비극으로 점철된 길을 걸어왔음을 다시금 떠올렸다.

“아리아?”

여자의 이름을 과감하게 입에 담았다. 여자의 이름을 부르는 내 매끄러운 음성이 우리 둘 사이의 공간을 가득 메운 것만 같다. 나는 대니얼이 나를, 아니 여자를 의식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재빨리 덧붙였다.

“여자에겐 선택지가 없어.”

말을 하는 내 음성이 뒤집혔다.

목을 가다듬으며 창문에 손바닥을 얹었다. 유리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몸을 기울여 저 아래 정원에 있는 에디슨을 내려다본다.

“놈들이 에디슨을 납치하는 데 성공했으면 에디슨한테 어떻게 했을 것 같아?”

이를 악물면서도 대니얼은 그 질문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게 물었다.

“누구 짓이었는지 모르잖아?”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였다.

“누구의 짓이었건, 여자들은 건드리지 않는 게 이 바닥 규칙이야. 하지만 놈들이 먼저 에디슨을 건드렸지.”

“그렇다고 해서 이 일이 정당화될 순 없어.”

대니얼의 음성에 분노가 실렸다.

“여자에게도 우리 쪽으로 오는 게 차라리 더 낫지 않을까?”

그러면서 내가 머리를 살짝 외로 꼬자, 이번엔 대니얼도 머뭇거린다.

“우리 일원도 아니잖아. 에디슨하고는 달라. 그 여자한테 형이 어떤 짓을 하기를 로마노가 기대하고 있는지 형도 알잖아?”

“알지. 원수의 딸….”

내 심장이 거세게 뛴다. 그 일정한 리듬에 괘종시계의 추를 떠올린다.

“그 여자한테 내가 어떤 짓을 하기를 로마노가 기대하고 있는지, 아주아주 잘 알지.”

2

아리아

당신이 나에 관해 알아두어야 할 몇 가지 팩트.

나는 매일 아침 뜨거운 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하길 좋아한다. 카페인 중독의 씁쓸함을 씻어버릴 만큼 크림과 설탕을 듬뿍 넣으면 더더욱 좋고.

밤이면 레드와인을 마신다. 화이트와인은 안 된다. 화이트와인은 이튿날 깨어났을 때 두통과 숙취에 시달리게 하니.

아니, 사실은 뭐가 됐든 상관없다. 사람들에게 솔직하기 싫을 때 대충 둘러대는 말일 뿐이니까.

당신이 나에 대해 정말로 알아야 하는 게 무엇이냐 하면.

내 이름은 ‘아리아 탤버리’이고, 폴브룩에서 가장 악명 높은 범죄 조직 두목의 딸이라는 거.

밤마다 내가 와인을 마시는 이유는 술기운의 도움 없이는 단 몇 시간도 잠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거.

내가 고작 여덟 살이었을 때 엄마가 내 눈앞에서 살해됐다. 그날 이후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데엔 도가 텄지만, 사실 나는 한순간도 괜찮았던 적이 없다.

내 아버지는 몹쓸 인간이지만, 매일 이런 나를 참아가며 안전하게 보호해주고 있다. 엄마를 쏙 빼닮은 나를 볼 때마다 괴로운 기색이 역력하긴 해도.

그게 다 이 눈 때문이라는 건 나도 안다.

내 눈은 엄마를 쏙 빼닮아 녹색과 갈색이 미묘하게 섞인 색이다.

늦여름이나 초가을 숲속 깊은 곳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뒤덮은 나뭇잎들을 우러르면 볼 수 있는, 녹빛과 갈빛이 부드럽게 어우러진 색.

엄마는 우리 눈 색깔을 묘사하면서 그렇게 말하곤 했었다. 엄마는 그런 식으로 시적인 사람이었다. 어쩌면 나는 엄마의 그런 면을 좀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팩트 넘버… 몇 번이 됐건 아무튼,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 나는 나의 이런 인생이 너무너무 싫다. 그래서 얼룩진 물감과 스케치 속에 숨어 나라는 존재가 태생적으로 타고난 광기와 위험을 외면한다.

예술을 향한 사랑은 유일하게 엄마와 나를 여전히 이어주는 접점이다. 내가 술집에 가 있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날 나는 내 스케치북을 훔쳐간 망할 자식을 쫓아 거기까지 갔었다. 자기가 유머깨나 있는 줄 아는 미친놈. 그 자식은 나를 늘 우습게 보고 무슨 장난감처럼 대했다. 나는 남자들의 세계에서 사는 여자, 그 세계의 위험 요소였으니까.

그런데 내가 성질머리 하나는 아버지를 닮았거든. 그래서 처치 스트리트에 있는 아이언 하트 주점을 직접 찾아갔다. ‘교회’라는 뜻의 이름이 붙은 거리에 있는 그런 술집이 있다니 참 모순 아닌가. 설상가상 그 벽들은 또 어떻고. 거기에 얼마나 무수한 죄악이 스며들어 있을지.

아무튼, 그날 나는 도둑맞은 내 소중한 스케치북을 쫓아 적의 품속으로 내 발로 걸어 들어가 있었다.

함정이었다. 엄마야 숙명이라고 했겠지만. 내가 지금 웃고 있기는 해도 이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는 비웃음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엄마 탓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 스케치북은 단 하나밖에 없는 엄마 사진이 안에 끼워져 있기에 내겐 둘도 없이 소중한 것이었다.

끝으로 당신이 나에 관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 나는 절대 굴하지 않는다는 것. 나는 굽히고 들어가지도 물러서지도 않는다. 그 누구에게도. 특히 카터 크로스에게는. 내게서 가족을 빼앗고 나를 방에서 가두고는 이제 내 인생은 끝났고 나는 자기 소유물이라고 지껄이는 그 개자식에게는.

그 세 치 혀에서 나오는 날 선 말들도, 나를 옴짝달싹 못 하게 가두는 넓은 어깨와 근육질 팔뚝도, 나를 괴롭히는 더러운 말들을 지껄이며 짓는 매혹적인 미소도, 나를 볼 때마다 튀는 그 눈 속의 불꽃도, 더 밝게 더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도 나를 굴복시키진 못한다.

절대 항복하지 않겠다. 설사 내 가슴속에서도 똑같은 열기가 피어나 온몸이 달아오를지라도.

그러나 명심해야 한다. 자신을 더 세차게 다독이며 싸우려고 기를 쓸수록 결국 굴복하는 순간이 오면 더 쉽게 뚝 부러지고 만다는 것을.

나는 그런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

내 인생이 영원히 바뀌고 만 그날.

쉼 없이 귀에서 이명이 울렸다. 하도 손을 세게 움켜쥐어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지경이었다.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망할 놈들을 마주할 때마다 일어나는 반응이다.

신경이 곤두선 것처럼.

아이언 하트 주점의 유리문을 지나며 내 가슴은 두근 두근 두근 뛰었다. 들어갈 생각은 없는 것처럼 계속 앞을 오갔다. 주점 전면이 유리라 사람이 드나드는 게 모두 보인다. 저 유리는 방탄유리이기도 하다. 이 주점 손님들을 위한 것이긴 하지만. 듣기로는 아버지가 비용을 댔다는데, 아버지치고는 퍽이나 과하게 후한 행동이었던 것 같다.

냉혹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 그게 내가 그리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 자신이 싫기도 하고.

아버지에게 늘 감사하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딸이었어야겠지. 어쨌든 나는 아버지에게는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누구든 나처럼 살다 보면 그런 방면으로는 재빨리 터득하게 될 거다.

창문 옆 검붉은 벽돌로 된 벽에 어깨를 기대며 길 건너편의 주차장을 바라본다. 이 자식들이 아직도 도착하질 않고 있다.

팔짱을 끼며 짜증스레 내쉰 한숨이 팽팽한 가을 공기 속으로 연기가 되어 흩어진다.

이 가게는 아버지 부하들이 밤이면 노닥이려고 오는 곳이니 미카 자식도 올 거다.

이런 데서 혼자 서 있기는 죽기보다 싫지만, 그렇다고 누가 짠하고 나타나 날 구해줄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을 수도 없었으니. 부디 니콜라이도 함께 오기를 빈다.

니콜라이는 지금은 아버지의 부하가 되었지만 내 어린 시절 소꿉친구이자 내 인생의 구명줄이다. 빈말이 아니라, 니콜라이는 내 단 하나뿐인 친구다. 아버지가 안 계실 때면 그 빌어먹을 미카 자식에게 제 자리가 어디인지 가르쳐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니콜라이가 와서 무난히 넘어가게 되든 어쨌든, 오늘 내가 여기로 올 수밖에 없었던 이 상황 자체가 너무나도 싫다.

곱은 손끝을 엄지로 연신 비비며, 미카가 방에 들어오기 직전에 내가 어떤 식으로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는지를 다시 떠올려본다. 사진은 스케치북 안쪽에 안전하게 잘 숨겨져 있었다. 사진을 볼 때마다 내가 영감을 얻을 수 있게.

스케치북은 어디서나 살 수 있는 흔한 것이지만, 그 안에 든 사진은 엄마가 죽던 그해 나와 엄마의 추억이 담긴 단 하나뿐인 유품이다.

아버지는 내 ‘쓸데없는 짓거리’에 낭비할 시간 따윈 없다고 했다. 그런 아버지의 반응에 심장이 조여들었었다.

어깨에 한기가 든다. 또다시 무거운 한숨을 쉰다. 코와 뺨이 얼얼하다. 입고 나온 재킷이 얇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무더웠던 여름날에 응수하듯 쌀쌀한 가을이 어느새 성큼 다가와 있던 것을 오늘에야 알았다.

시선만 슬쩍 들어 주점 창문 너머 바 위에 걸린 메뉴판을 엿봤다. 메뉴판에 적힌 술은 모두 지역 생산품이고, 한 잔 기준이다. 기다리는 동안 한 잔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안으로 들어서자 부드러운 음악이 귀를 울렸다. 바 앞 스툴에 앉은 몇 안 되는 남자들 사이로 들어가며 내 가슴은 더 가파르게 뛴다. 참 웃기는 것이, 나는 붐비는 술집보다 텅 빈 술집이 더 무섭다. 사람들이 많아야 나도 섞여들기 좋은데.

그런데 지금 이곳에서 나는 물과 기름처럼 겉돈다. 여기 있는 사람들도 모두 아는 것 같다.

이러니 미카 자식은 그걸 들고 무사히 튈 수 있을 거라 착각했을 만도 하지.

내 안의 겁먹은 어린 여자애를 무시하려 애쓰며 씁쓸히 생각했다. 내 아버지는 자기를 막지 않을 테고, 나도 혼자서는 집 밖으로 나올 용기조차 내지 못하는 겁쟁이라고 판단해 내 것을 훔쳐가도 된다 싶었던 거지.

나는 등을 꼿꼿이 세우고 홀 안으로 들어가 바텐더 앞에 선 뒤 클러치를 내려놓았다. 내게도 계획이란 게 있다. 침을 삼킨 뒤 미소 지으며 술을 주문했다.

“보드카에 스프라이트 섞어서.”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으며 바텐더와 눈을 맞추고 주문했다. 고개를 끄덕한 바텐더가 물 흐르듯 움직여 유리잔들을 달그락거리며 한쪽 잔에 얼음을 채운다.

여기서 기다려야지. 어떤 짓까지 할 수 있는 이들인지 알기에 무섭긴 하지만, 미카의 눈을 똑바로 보며 내일까지 내 스케치북을 반드시 가져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뒤 당당히 걸어나가는 거다. 위협은 할 필요도 없다. 딱 할 말만 할 것이다. 미카 자식은 또 날 놀리며 괴롭히려 들겠지만, 여지는 주지 않을 거다. 그 자식은 그러려고 가져간 걸 거니까.

날 괴롭히며 짜릿함을 느끼는 거지.

순간, 바람에 오른편 유리창이 덜컹대서 기겁했다. 다행히 바 앞에 줄지어 앉은 남자들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다.

주점 창문에 걸린 표지판이 연신 유리창에 부딪히는 것에 정신이 팔려 바텐더가 다가오는 것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단풍나무로 만든 단단한 바 테이블에 딱 하고 유리잔이 부딪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 얼결에 벌떡 일어섰다.

순간 주점 안이 조용해지면서 시선이 온통 내게 쏠려 나를 더 긴장하게 했다. 나는 엉거주춤 미소를 짓고는 자세를 바로 한 뒤 바텐더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처음에는 창피함이, 뒤이어 내가 약해빠졌다는 걸 다른 이들이 알아챈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그러자 모든 게 잘못될 것 같아 불안해진다. 극도로 잘못될 것만 같은 기분.

구역질이 일었으나 토하는 대신 차가운 술잔을 들어 입술에 댔다. 달달한 칵테일 한 모금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두 모금을 마셨는데도 여전히 갈증이 인다.

난 왜 이리도 바보 같은 것인지. 아랫입술에 묻은 칵테일을 살짝 핥고 잔을 내려놓은 후, 선반 위에 줄지어 선 술병의 알록달록한 상표를 물끄러미 본다.

이곳엔 나를 위해 나설 줄 이 하나 없는데, 앞으로 닥칠 일을 생각하자 가슴이 조마조마해 죽을 지경이다. 침을 꿀꺽 삼켜도 아무 소용이 없기에 나는 서늘한 바 테이블을 손으로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하다. 하마터면 바텐더에게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할 뻔했다. 내가 그러든 말든 누가 신경 쓴다고.

그런 자괴감은 바 왼편의 좁다란 복도를 향해 내딛는 걸음마다 나를 따라왔다. 주점 안에 길이라고는 이것뿐이니 화장실은 저 안쪽에 있을 거다. 몇 걸음 채 떼지 않았는데, 얼핏 총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몸이 움찔하면서 심장이 얼어붙는다. 여전히 뛰고는 있겠으나 심장박동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비명 지르는 사람 하나 없이 홀에는 여전히 음악이 흐른다. 착각이었나 보다. 전부 내 머릿속의 상상.

눈을 감고 어서 숨을 쉬라며 자신을 다독였다. 그러나 매우 익숙한 소리에 내 눈은 바로 번쩍 뜨였다.

총이 발사되는 시끄러운 소리가 아니다. 소음기를 단 총이 내는 핏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사람이 바닥에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

쿵 쿵! 연달아 두 사람이 쓰러지고, 이번에는 모든 소리가 바짝 가까워진다. 또 한 발. 나는 벽에 들어가 숨을 수 있기라도 하듯 몸을 바짝 붙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서 뒤로 움직여 도망칠 길을 찾거나 어디든 가서 숨으라며 자신을 다그쳤다. 내가 비록 아버지의 세계에서 근근이 살아남은 겁에 질린 어린애이긴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는 아니다.

살려는 의지로 걸음을 재촉해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나 젖먹던 힘까지 박박 긁어모은 내 용기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터져나간 비명도 두꺼운 자루가 머리에 쓰이자마자 가로막혔다.

내 클러치는 앞에 선 남자를 걷어차려다 빗맞힌 내 허벅지를 치고 바닥에 떨어졌다. 구두도 벗겨져 날아갔다. 발버둥 치며 헛발질을 할 때마다 다수의 남자가 조롱하는 거친 웃음이 들렸다.

싸우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상대가 여럿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나를 붙잡은 손아귀들은 억셌고, 몸은 단단한 벽돌들 같았다.

나는 계속해서 싸우려 들었지만, 그런 나의 저항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었다. 겁에 질려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고 소리를 지르고 발버둥 쳤다. 어서 이놈들을 밀쳐내고 도망치라며 나 자신에게 애걸했다. 그러나 눈앞엔 아무것도 볼이지 않고, 팔은 놈들에게 붙들린 채 뒤로 꺾여 고통에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얇은 재킷에 싸늘한 바람이 파고들어 바깥으로 끌려 나온 것을 알았다. 내 몸이 던져지기 전에 들린 뚜렷한 열림 소리, 내 작은 몸뚱이가 내동댕이쳐지자마자 이어진 닫힘 소리에 차 트렁크 속에 갇혔다는 것을 알았다.

적막.

어둠.

숨이 거칠어진다. 가벼운 현기증이 인다.

비명 지르기를 멈췄다. 목은 잔뜩 쉬었고, 침을 삼키려 할 때마다 목구멍이 불에 덴 듯 따가웠다. 발버둥 치는 것도 그만두었다. 묶인 손목이 끈에 쓸려 벌겋게 까졌다. 온몸이 푹푹 쑤시고 떨려왔다.

그러자 또 다른 감정이 나를 덮쳤다. 공황 같은 게 아니라, 그보다는 다른 무언가.

절망감도 아니다. 그것과도 다른 무언가.

세상에 혼자 남겨졌는데, 모든 게 잘못됐고 앞으로도 잘못되리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압도되어 헤어날 길이 없는 그런 감정.

일련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내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다. 하지만 너무 빨리 뛴다. 모든 게 너무도 빠르고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어느 것 하나 막아낼 수 없다.

할 수 있는 짓은 다 해보았지만 이미 겪은 적이 있는 일에 대한 두려움과 아직 겪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만 남은 순간, 그 순간에 떠오른 감정을 묘사할 표현은 하나뿐이다.

나는 진정한 공포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