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많은 신데렐라

프롤로그

X

   저 왕자는 내 거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곧 그리될 것이다.

   그의 성도 나의 것!

   그의 왕국도 나의 것!

   계모의 딸들 면전에 대고 나의 승리를 자랑하며 코를 납작하게 해줄 거다. 나는 세상의 모든 부를 누리겠지만 그것들에겐 국물도 없다.

   문제는, 이 목표를 이루려면 먼저 백마법을 모아야 하고, 백마법을 모으려면 착해야 한다는 거다.

   나는 착한 게 싫다.

1

X

   계모가 나를 거실로 불렀다.

   계모는 나더러 자기를 그냥 어머니로 부르라고 했었다. 또는 백작 부인으로. 심지어는 자기 이름인 ‘엘리라’로. 나는 계모에게 저항했다. 계모 본인에게, 또한 나 자신에게 저 여자가 진정 어떤 존재인지 상기시키기 위해. 계모는 짓밟아야 할 대상이다.

   백마법이 충분히 모이면 뒤꿈치로 딱정벌레를 밟아 죽이듯 계모를 밟아 버릴 거다. 짓밟고, 짓밟고, 또 짓밟아 뼈가 똑똑 부러지고 바스러져 가루가 되도록.

   온통 새하얀 거실로 들어갔다. 레이스 커튼, 벨벳 가구, 푹신한 카펫. 계모가 흰색을 택한 것은 아주 작은 티끌 하나라도 눈에 띄게 하기 위해서일 거다. 항상 어딘가에는 내가 닦아내야 할 곳이 있다.

   “어서 오렴, 사랑하는 우리 딸.”

   계모는 나를 아주 하녀처럼 부려대면서도, 부를 때는 꼭 제 딸들을 부를 때처럼 ‘사랑’ 운운한다. 내가 자기를 꼬박꼬박 ‘새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복수일 거다. 맹세컨대, 나는 그 누구의 사랑도 아니다.

   계모는 부러질 듯이 가는 손가락으로 기다란 양피지 두루마리를 들고 있었다. 아래가 도르르 말려 왕가의 문장이 내비쳤다. 성에서 보내온 거다.

   “어머나, 왕자님께서 무도회를 여신다는구나.”

   “예….”

   나는 지극히 공손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진짜 내가 그러고 싶었겠어? 왕자는 철철이 무도회 한두 번은 꼭 열고 지난다. 무도회라면 아주 환장을 하거든.

   계모가 두루마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재미있구나. 온 나라의 미혼 아가씨는 모두 참석하라고 하셨어.”

   “미혼이요?”

   손끝이 찌릿했다.

   “그럼 저도 가도 되나요?”

   계모가 잿빛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우습다는 듯 같잖다는 듯. 말은 따로 필요 없다.

   당연히 나는 못 간다.

   “그러면 우리 딸들이 이번 무도회에 입을 새 드레스가 있어야 하겠구나. 그야말로 새 드레스가. 뭔가…, 화려하고, 왕자님 눈에 화악 들 수 있는 것으로.”

   계모는 싸늘히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사흘이면 되겠지?”

   가슴이 철렁했다.

   “사흘이요?”

   무도회용 드레스를 두 벌이나 지어야 하는데? 옷감을 사고, 디자인을 정하고, 가위질에 바느질, 바느질 또 바느질. 시침질이 끝나면 맞춰 보고, 수선에 또 수선을 거듭하는 와중에도 계모의 두 딸년은 이랬다저랬다 변덕이 죽 끓듯 할 게 뻔한데. 그러려면 한 달은 족히 걸린다.

   “네가 맡은 집안일은 당연히 해야 하는 거고.”

   나는 멀쩡한 목소리를 낼 자신이 없어서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계모는 일어나 양피지를 둘둘 말았다.

   “최상품이 죄다 팔리기 전에 당장 가서 옷감부터 사는 게 좋겠구나. 아… 그리고 이 소파 팔걸이에 얼룩이 남아 있더구나.”

   계모가 나를 보며 생긋 웃었다.

   “잊지 말고 지우렴.”

   “네, 새어머니.”

2

X

   아, 난 계모가 싫다.

   미치도록 싫고

   진저리나게 밉고

   증오스럽다.

   솔직히 내 인생의 모든 것이 싫다. 형편없는 포목점을 향해 걷고 있는 이 거리만 해도, 어찌나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았는지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 예쁘장한 집들, 뾰족한 지붕과 알록달록한 덧문들, 꽃으로 장식한 창문들. 양귀비나 제라늄 같은 조잡한 꽃들. 하여간 미적 감각들 하고는.

   흐음…. 나는 내 수수한 회색 치맛자락을 바로 잡으며 피식 웃었다. 왕궁도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겠지. 하지만 내가 여왕이 되는 순간 모든 게 바뀐다. 내가 원하는 것은 싸늘한 우아함이다. 새까만 대리석 바닥. 은빛 샹들리에. 왕좌는… 크리스털이 낫겠네. 그래, 그게 좋겠어. 내가 앉을 견고한 크리스털 왕좌. 그리고 이 보잘것없는 왕국의 백성들에게 휘두를 공포! 모름지기 여왕이라면, 백성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어야지.

   “안녕하세요, 각하.”

   나는 부인과 팔짱을 끼고 산책을 하는 버튼 경에게 친근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버튼 경은 안절부절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의 눈이 단검처럼 남편을 째린다. 질투지. 그래, 질투가 날 만도 하지.

   나는 내가 예쁘다고 말하는 게 부끄럽지 않다. 내가 왜 겸손해야 하는데? 이 외모를 가꾸기 위해 몇 년이나 백마법을 모았는데. 이 금빛 머리를 갖기 위해 꼬박 일 년은 바닥을 닦았고, 반듯한 코를 얻기 위해 두 해 겨울 내내 벽난로의 검댕을 긁었다. 산더미 같은 스타킹과 페티코트를 수선하고 나자 발 크기가 줄었다. 음, 이건 좀 과하게 몰입했는지 이제 내 발은 하도 작아서 거의 어린애 발 같다. 하지만 괜찮아. 어쨌든 여자들이 부러워할 만한 거니까.

   계모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계모가 나를 하녀 부리듯 한다고 했지? 사실이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이건 내가 자초한 일이기도 하다. 허드렛일을 하면 더 많은 백마법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나는 계모와 두 딸에게 집안일을 하겠다고 자청했다. 더 즐겁게 일을 할수록 나는 더 많은 백마법을 모을 수 있었다. 돈 주고 부리던 하녀들의 일을 내가 기꺼이 하는 것을 본 계모는 때는 이때다 하여 고용인들을 모조리 내보내더니 집안일을 몽땅 내게 떠맡겼다. 할 일은 태산이고, 내 아름다움은 꽃을 피웠으며, 증오심은 가시나무처럼 내 마음을 휘감았다.

   그리고 계모는 사람이 변했다. 계단을 쓸고 빨래 좀 한다고 내가 왜 갑자기 아랫사람이 되고 마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계모는 나를 하녀처럼 대했다. 멍청한 두 딸년도 곧 제 어미를 따라 했다. 나는 둥지 밖으로 곤두박질친 어린 새보다도 더 빨리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됐다. 그들은 집안일을 더는 부탁하지 않고 명령했다. 급기야 ‘근사한 도서관’을 꾸밀 거라는 명목으로 내 침실을 빼앗았고, 나는 다락 맨 끝방으로 쫓겨났다. 심지어 제대로 된 방도 아니었다. 쓰레기가 쌓여있지 않다뿐이지.

마침내 포목점에 도착했다. 포목점은 모자점과 구두점 사이에 낀 작고 촌스러운 점포다. 모든 상점은 빨강으로 칠한 문, 자잘한 판유리를 끼운 네모꼴 커다란 창, 그리고 발랄한 간판을 달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나는 우뚝 멈춰 섰다.

   헉. 계모의 말이 맞았다. 가게 안은 여자들로 꽉 차 있었다. 부딪히고, 휘둘리고, 손을 뻗어대고, 고함에 실랑이에 아비규환이었다. 홱홱 돌아가고 미끄러지는 치맛자락에 바닥은 보이지도 않는다. 물건이 잔뜩 쌓인 벽 쪽에는 딱 보기에도 붉은 천은 모조리 사라지고 없다. 괜찮아. 루닐라가 화를 내겠지만, 걔가 언제는 화를 내지 않은 적 있어? 나는 계모의 큰딸인 루닐라를 남몰래 ‘루니’라고 부르고 있다. 정신 나간 미치광이 루니.

   뒤엉킨 손님들 뒤쪽에 있는 벽에 착 달라붙어 살금살금 나아갔다. 부디 내 자그마한 발을 아무도 밟지 않기를 빌며. 숨을 한껏 들이마신 후, 레이디 오델리아의 커다란 엉덩이를 피해 빠져나갔다. 레이디 오델리아는 분홍 비단과 파란 벨벳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다. 풋! 행여나 왕자가 너한테 눈길이라도 주겠다.

   어깨를 안쪽 벽 선반에 부딪히고 나서야 겨우 숨 쉴 만한 공간을 발견했다.

   아무도 칙칙한 잿빛, 검은 천에는 관심이 없다. 내 차례가 돌아오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옷감을 훑었다(인내하면 백마법을 더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눈에 띄었다. 암흑처럼 짙으면서도 흑진주처럼 빛을 발하는 새틴 한 필. 내 뒤편의 방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은은히 빛나는 어둠 같은 이 드레스를 입고 반짝반짝한 금

발을 자랑하며 왕실의 무도회장으로 입장하는 나의 모습이 보인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

   눈에 확 띌 만한 것이 있어야 한다고. 계모가 그랬지.

   왕자는 이걸 보고는 절대 그냥 못 지나칠걸?

   묵직한 천을 집어 아기처럼 안아 들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필코, 나는 무도회에 가고야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