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드 앤 월플라워

프롤로그

과거

세 아이는 스스로 깨닫기 아주 오래전부터 죽음으로도 끊을 수 없는 강철 같은 운명의 실로 엮여 있었다.

한날한시에 한 아비와 각기 다른 세 어미—고급 창녀, 삯바느질하는 침모, 군인의 과부에게서 태어난 이복형제.

잔혹한 운명은 아비인 공작을 주저 없이 벌했다. 제아무리 많은 돈과 권력을 쥐고 미치도록 간절히 원해도 공작은 정당한 후계자를 둘 수 없었다.

로마의 권력자 카이사르에게 배신과 복수, 그리고 운명이 뒤집히는 섭리의 날이 닥칠 것이라 예언된 날은 3월 중순의 어느 날.

그리고 결코 누군가의 ‘아버지’라 할 수 없이, 그저 씨뿌리는 종마(種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자에게 예정된 파멸의 시간은 6월 중순의 어느 날이었다.

세 형제가 태어난 그 날 그 시각. 네 번째 여자인 공작부인도 아이를 낳았다.

공작은 그 아이가 사실은 제 핏줄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온 세상이 인정할 적자의 탄생을 곁을 지키며 고대했다. 마윅 공작가의 성(姓)과 재산, 그리고 미래를 물려받을 이 아이가 그에게는 단 하나 남은 희망이었으니.

그러나 태어난 아이는 딸이었다.

첫 숨을 내쉬면서부터 아이는 모두의 미래를 앗아갔다. 아이의 힘은 갓 난 순간부터 강력했다. 그러나 이 딸아이의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이번 이야기는 사내아이들로 시작한다.

 

1

현재

1837년 5월

데블은 마윅 공작저의 느릅나무 고목 밑 어두운 그늘 속에서 저택 창문 너머로 이복형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일렁이는 촛불과 어룽어룽한 유리 때문에 무도회장에서 흥청대는 사람들이 일그러져 보인다.

무리 지어 이동하는 귀족들과 돈 많은 젠트리들을 보고 있노라니 데블은 쑥 빠졌다가 다시 밀려드는 악취 나는 검은 템스강물이 떠올랐다.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들, 실크와 새틴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이 얼굴 없는 형체로 무도회장 안을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고개를 쭉 빼고 부채질을 해대며 갑갑한 공기 중에 온갖 추측성 수다와 험담을 퍼뜨리고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는 다들 보고 싶어 안달이 난 사교계의 반짝이는 신인이 있다.

그의 아버지가 죽어, 아니, ‘그들’의 아버지가 죽어 작위를 이은 지 꽤 되었으나 시골 영지에만 틀어박혀 있던 젊은 마윅 공작.

아버지는 무슨! 씨나 뿌리는 종마지.

마윅 공작은 돌아온 탕아처럼 런던에 등장했다.

남보다 머리 하나만큼 큰 키에 금발, 무심한 표정, 마윅 공작가가 대대로 자랑해온 호박빛 눈동자.

미혼에 신체 건강하니 모든 귀족이 바라는 조건은 빠짐없이 갖춘 셈인 공작. 그러나 진실은, 귀족의 기대와는 거리가 멀고도 먼 공작.

데블은 무도회장을 떠다니며 혼란을 조장하는 무례한 귓속말들을 상상할 수 있다.

—저렇게 걸출한 남자가 왜 은둔자 행세를 했지?

—공작인데 무슨 상관이야?

—그 소문들이 진짜일까?

—거짓인들 뭐 어때. 공작인데?

—런던에는 왜 얼굴 한번 안 비쳤지?

—공작인데 그게 뭐?

—소문처럼 진짜 미친 거면 어떡해?

—아무렴 어때. 공작인데?

—후계를 잇는 데 관심 있다며?

데블이 어둠 밖으로 나온 것은 그래서다.

20년 전, 형제였던 그들은 계약을 맺었다.

그 후로 수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어길 수 없는 한 가지. 그 누구도 데블과 맺은 계약은 깨지 못한다.

대가를 치를 각오 없이는.

데블은 마윅 공작저의 정원에서 세 번째 계약 당사자를 끈기 있게 기다렸다.

데블과 위트, 런던 암흑가에서 ‘맨주먹 형제들’로 악명 높은 두 사람이 공작을 보는 것은 십여 년 만이다.

숱한 비밀과 죄악을 뒤로하고 한밤중에 시골 영지를 탈출해 또 다른 비밀과 죄악으로 가득한 그들만의 왕국을 세운 후로 처음.

2주 전, 런던에서 가장 호화로운 저택과 신망 있는 가문들 앞으로 초대장이 배달됐다.

그와 동시에 걸레와 왁스, 다리미와 빨랫줄 등등을 한 아름 안은 하인들이 마윅 공작가의 런던 저택인 마윅 하우스로 줄지어 들어갔다.

일주일 전에는 궤짝 여러 개가 도착했다. 궤짝 안에는 초와 옷감, 감자와 돼지고기, 마윅 하우스의 거대한 무도회장에 놓일 안락의자 여섯 개가 들어있었다.

지금 그 안락의자에는 런던에서도 손꼽히는 신붓감들의 드레스 자락이 뽐을 내고 있다.

맨주먹 형제들의 코벤트 가든 본부에 『뉴스 오브 런던』지가 배달된 것은 사흘 전. 신문 4면에 잉크가 번질 만큼 진한 헤드라인으로 이런 문구가 달려 있었다.

「신비에 싸인 마윅, 결혼?」

데블은 신문을 고이 접어 위트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튿날 아침 사무실에 가자, 수리검 한 자루가 신문을 꿰뚫고 참나무 책상에 박혀 있었다.

일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그들의 형제인 공작이 작위와 함께 물려받은 런던 저택으로 예고 없이 돌아왔다.

존경받는 이들을 위한 곳이었으나 악한이 득시글거리는 이곳 런던으로. 데블과 위트의 영역 속으로.

공작은 그런 식으로 제 탐욕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곳에서 공작의 탐욕은 결단코 용납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 이곳에서 데블은 때를 기다리며 공작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잠시 후 바람 방향이 바뀌며 마치 전쟁터의 지원군처럼 소리도 없이 나타난 위트가 데블의 팔꿈치를 툭 쳤다.

“때맞춰 왔군.”

차분한 데블의 말에 위트는 침음성으로 응답했다.

“공작이 신붓감을 찾고 있어?”

어둠 속에서 고개만 끄덕.

“대를 잇겠다고?”

침묵.

데블의 질문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분노해서.

데블은 그들의 이복형제가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무도회장 끝으로 이동해 저택 내부로 뻗은 컴컴한 복도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번에는 데블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감생심 꿈도 못 꾸게 해주겠어.”

데블은 흑단 지팡이를 쥐었다. 오래 쓴 티가 나는 사자 갈기 모양의 은장식 머리가 손아귀에 꼭 맞는다.

위트도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하지 않아도 둘 다 알고 있다.

지금 런던에서는 ‘로버트’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마윅 공작은 한때는 ‘이완’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소년이고, 귀족이라기보다는 짐승에 가깝고, 유일하게 그들을 능가했던 놈이다.

그러나 그것은 데블과 위트가 아직 코벤트 가든의 제왕이 된 훨씬 이전, 위협에 맞서 무기를 정확히 휘두르는 법을 배우기 이전의 일이다.

오늘 밤 그들은 공작에게 런던은 그들의 무대라는 사실을 똑똑히 알려주고 시골 영지로 돌려보낼 것이다. 저택 안으로 잠입해 그들이 오래전에 맺은 계약을 상기시키기만 하면 끝날 일.

마윅 공작은 절대로 후계를 이어선 안 된다는 계약을.

“건투를.”

내내 말을 하지 않아 쉰 음성으로 위트가 나직이 내뱉었다.

“건투를.”

데블도 대꾸했다. 두 형제는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어둠이 깔린 발코니로 소리 없이 이동했다.

데블이 난간을 우아하게 훌쩍 뛰어넘어 어두운 발코니로 조용히 내려서자 위트도 뒤를 이었다.

늘 잠겨 있어 손님이 드나들지 않을 온실을 잠입 통로로 삼았다. 공작과 담판을 짓기 전까지는 무도회 참석자들 사이에 섞여 있어야 할 것이기에 정장 차림이다.

마윅 공작이 맨주먹 형제들에게 혼쭐이 나는 첫 귀족도 아니거니와 마지막이 되지도 않겠지만, 데블과 위트는 이번만큼은 더 각별히 별렀다.

그러나 데블은 문손잡이를 잡으려던 손을 확 거뒀다. 즉시 뒤로 물러나 어둠에 몸을 숨기자, 그와 동시에 위트도 발코니 밑 잔디로 소리 없이 뛰어내렸다.

그러자마자 한 여자가 발코니로 들어섰다.

여자는 발코니 문을 황급히 닫고는 등으로 눌렀다. 그렇게만 해도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을 수 있을 것처럼.

그런데 이상하게도 데블의 눈에는 여자가 정말로 그럴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여자는 문에 머리를 기댄 채 가슴을 들썩였다. 달빛 아래로 드러난 긴 목이 창백했다. 그런 자세로 보디스 위의 노출된 가슴 부위에 장갑 낀 한 손을 얹고는 달뜬 숨을 고르고 있었다.

다년간 사람들을 관찰해온바, 여자의 행동은 꾸밈이 없고 자연스러웠다. 여기에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도, 이렇게 관찰당하고 있는 것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달빛에 여자의 드레스가 희미하게 어른거렸으나 빛이 약해서 무슨 색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파란색? 아니, 초록색인가? 빛에 따라 어느 부분은 은빛, 또 어느 부분은 검정으로도 보였다.

아, 달빛.

여자는 마치 달빛을 입은 듯했다.

돌난간 쪽으로 움직이는 여자를 데블은 더욱 시선을 모으고 관찰했다. 좀 더 잘 볼 수 있게 밝은 데로 한 걸음 나가볼까 하는 생각마저 언뜻 들었다.

그 순간 나이팅게일이 나직이 울었다. 위트가 데블에게 경고하는 소리다. ‘우리에겐 계획이 있다, 저 여자는 걸림돌일 뿐 우리와는 아무 상관 없다’며.

하지만 저게 진짜 새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까맣게 모르는 여자는 돌난간을 짚으면서 하늘을 우러르더니 숨을 돌리고는 경계 자세를 풀었다. 어깨가 부드럽게 늘어진다.

쫓기고 있었나?

그래서 어두운 방으로 뛰어들었다가 그보다 더 위험할 수 있는 사내가 있는 어두운 발코니로 들어서게 된 건가. 데블은 뭔가 달갑지 않은 일에 엮인 기분이 들었다.

그때, 어둠 속에 터진 총성처럼 여자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데블의 온몸이 바짝 긴장했다. 어깨 근육이 팽팽히 땅기고, 지팡이를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하마터면 여자 쪽으로 다가갈 뻔했다. 이번 싸움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음을 상기한다.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다. 여자 하나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는 않을 것이다.

주위가 어두워서 여자의 모습이 뚜렷이 보이는 것도 아니건만, 그런데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누가 가서 저것들이 얼마나 끔찍한지 얘기 좀 해!”

여자가 위를 쳐다보며 외쳤다.

“아만다 페어팩스! 네 얼굴의 미인점이 진짜라고 믿는 사람 아무도 없거든? 그리고 해긴 경! 누린내 나니까 제발 몸 좀 깨끗이 씻어! 그리고 제러드 포크! 우리 어머니가 연 별장 파티 때 연못에 풍덩 빠진 걸 내가 도와줘서 사람들 눈에 안 띄게 엉덩짝 말렸던 거 기억 안 나니?!”

그러다 말이 뚝 끊겼다. 그제야 데블은 여자가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잠시 후 여자가 다시 불쑥 내뱉었다.

“그리고 나타샤, 너는 꼭 그렇게 재수 없게 굴어야 하니?”

“고작 그렇게 밖엔 말을 못 합니까?”

데블은 자기가 말을 해 놓고 놀랐다. 지금 발코니에서 혼자 구시렁대고 있는 여자와 이럴 때가 아닌데.

방금 귀에 거슬리는 나이팅게일 울음소리로 경고했던 위트는 더 놀랐다.

하지만 다른 누구보다 가장 놀란 사람은 여자였다.

꺅 외마디 비명을 지른 여자가 보디스 위로 드러난 가슴살을 가리면서 이쪽을 돌아보았다.

보디스는 무슨 색이었지? 달빛이 계속 어른거려 정확한 색을 알 수가 없다.

여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둠 속을 주시했다.

“거기 누구시죠?”

“갑자기 큰소리로 외쳐서 놀랐습니다.”

그러자 여자는 가는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혼잣말이었어요.”

“그 나타샤라는 사람에게는 재수 없다는 말보다 더 심한 말이 없습니까?”

여자는 이쪽으로 한 걸음 떼었다가는, 어둠 속 낯선 사내에게 다가가도 될지 망설여지는지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렇게 물으시는 분은 나타샤 콕우드를 어떻게 표현하시겠어요?”

“나야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니 뭐라 표현할 수 없지요. 다만 당신이 해긴의 위생 상태를 호되게 비난하고, 포크의 난처했던 과거 일을 끄집어내는 것으로 보아, 분명 나타샤 양도 비슷한 수준의 평가를 받아야 할 듯합니다만?”

여자는 어둠을 한참 응시하다가 남자의 왼쪽 어깨너머 언저리에 시선을 고정했다.

“누구세요?”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

“마윅 공작저의 어두운 발코니에 있는 것으로 봐서는 심히 대단한 남자분일 듯한데요?”

“그럼, 같은 이유로 그쪽 분도 심히 대단한 여자분이시겠군요?”

그 말에 여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러운 큰 웃음소리에 웃은 여자나 듣는 데블이나 서로가 놀랐다.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그쪽 분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걸요?”

“다른 사람들 의견에는 관심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교계 분이 아니시겠군요. 이곳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황금과도 같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해요.”

이 여자 뭐지?

“왜 온실에 있었습니까?”

여자가 눈을 깜박였다.

“여기가 온실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다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본인 소유가 아닌 집이라도?”

이 집은 거의 내 것이었습니다, 한때는, 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온실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데, 그쪽 분은 왜 여기에 있습니까?”

여자가 대답은 하지 않고 어깨만 으쓱여서 이번에는 그가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남자를 만나러 왔습니까?”

그 말에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고요?”

“어두운 발코니가 밀회 장소로는 더할 나위 없죠.”

“그런 줄 미처 몰랐네요.”

“발코니를? 아니면 밀회 장소인 것을?”

별 뜻이 있어 물은 것은 아니었다.

“둘 다요. 솔직히.”

데블은 왠지 그 대답이 만족스러웠다.

그러자 이번엔 여자가 물었다.

“내가 여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나요?”

“아니요. 더구나 이 온실은 출입금지 구역이니.”

“그런가요?”

“어두운 방은 출입금지 구역이라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죠.”

여자가 부정하듯 손을 내저었다.

“난 그렇게 영리하진 않아요.”

그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자, 여자가 말을 덧붙였다.

“그럼, 나도 똑같은 질문을 하나 할게요.”

“무엇을?”

데블은 여자가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는 그쪽 분께서는 여기에 밀회를 하러 오셨나요?”

한순간 두 남녀가 한여름 밤에 이 어두운 발코니로 와서 밀회를 나누는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사람들이 춤을 추며 소문을 수군대는 사이, 여자를 이곳으로 이끄는 그.

또는 그를 이곳으로 이끄는 여자.

돌난간 위에 여자를 올려놓고 살결의 감촉과 향을 느끼는 것을 상상한다. 여자가 만족에 겨워 내는 소리는… 한숨? 아니면 울음?

데블은 순간 멈칫했다. 생긴 것도 평범하고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몸매에다 혼잣말이나 중얼대는 저런 여자는 취향이 아닌데, 내가 왜 이러지?

“침묵은 긍정의 뜻으로 이해하겠어요. 그럼 저는 이만 밀회 장소에서 사라져 드리죠.”

그러면서 여자는 뒤돌아 발코니 저편으로 가려 했다.

데블은 여자를 그대로 가게 두었어야 했다. 이렇게 소리칠 게 아니라.

“밀회 같은 건 없습니다!”

나이팅게일이 또 울었다. 아까보다 더 빠르고 크게. 위트가 짜증을 내고 있다.

“그게 아니면 그쪽이야말로 왜 여기 있는데요?”

“아마도 당신과 같은 이유에서겠지요?”

여자가 코웃음을 쳤다.

“그쪽 분이 한때는 친구였던 이들에게 조롱받고 어두운 데로 도망쳐 나온 노처녀일 것 같지는 않은데요?”

짐작이 맞았다. 여자는 쫓기고 있었다.

“그렇군요. 나하고는 전혀 맞지 않는 얘기로군요.”

여자는 뒤로 물러나 난간에 몸을 기댔다.

“밝은 데로 나와보세요.”

“그렇게는 못 합니다.”

“왜요?”

“왜냐하면, 나는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니까요.”

그러자 여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그래요.”

“당신은 발코니에 있으면 안 되지만, 나는 이 저택 안에 있으면 안 됩니다.”

그 말에는 여자가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댁은 누구시길래요?”

데블은 그 물음엔 대답하지 않고 다른 것을 물었다.

“당신은 왜 노처녀입니까?”

사실 그게 중요하지는 않다.

“결혼을 안 했으니까요?”

그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내가 질문을 잘못했군요.”

“우리 아버지 같았으면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하라고 지적하셨을 거예요.”

“당신 아버지가 누구인데요?”

“그러는 당신 아버지는요?”

저렇게 따박따박 대꾸하는 여자는 처음 본다.

“나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세상에 아버지 없는 사람은 없어요.”

“인정하고 싶은 아버지는 아니죠.”

말은 차분하게 나갔으나 속은 그렇지 못했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갑시다. 당신은 왜 노처녀입니까?”

“아무도 나와 결혼하려 하지 않으니까요.”

“왭니까?”

“나는….”

여자는 말을 하려다 멈추고는 두 손을 활짝 펼쳤다. 장갑 낀 긴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이유를 대기 시작하자 데블은 뒤가 궁금해 조바심이 났다.

“혼기가 지났어요.”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데?

“평범해요.”

사실 여자는 평범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오히려 그 반대라 할 수 있다.

“매력도 없어요.”

절대 아니다.

“공작한테 차였어요.”

그럴 리가?

“무슨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있었죠. 어처구니없게도 문제의 공작은 애초에 나하고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까.”

“왜요?”

“자기 아내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었거든요.”

“그것참 안 된 일이군요.”

여자는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하늘을 우러렀다.

“공작부인에겐 잘된 일이죠.”

난생처음 데블은 누군가에게 가까이 다가가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도 여전히 어둠 속에서 벽에 기대어 선 채 여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이유를 잘 안다면, 왜 무도회에 와서 시간 낭비를 하고 있습니까?”

그러자 여자가 가볍게 웃었다. 나직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웃음소리였다.

“어머, 모르세요? 모름지기 미혼 여성은 미혼인 신사들 근처에 있어야 시간을 잘 보내는 거랍니다.”

“아, 그러니까 당신은 남편감 찾는 일을 영 포기한 건 아니로군요?”

“희망은 샘솟는 법이지요.”

여자가 어찌나 천연덕스럽게 대답을 하는지, 데블은 하마터면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요즘은 어머니가 구혼자들에게 엄격한 조건을 들이대시기 때문에 그것도 쉽진 않네요.”

“이를테면?”

“힘찬 심장박동 같은 거?”

끝내 웃고 말았다. 하도 엉뚱한 대답이라 웃음이 툭 터졌다.

“그리 높은 기준이면 곤란할 만도 하겠군요.”

그러자 여자가 달빛에 치아를 하얗게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마윅 공작이 나한테 관심 없을 만도 하죠. 나도 알아요.”

순간 데블은 이날 저녁의 본래 목적이 떠올랐다.

“마윅을 만나러 왔습니까?”

내가 살아 있는 한은 어림도 없을 일!

여자는 손을 내저었다.

“내가 아니라 우리 어머니가 만나고 싶어 하시죠. 런던에 사는 다른 어머니들처럼.”

“사람들 말로는 공작이 미쳤다던데요?”

“그건 그냥 사교계 밖의 삶을 택한 사람을 상상할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들 말하는 거고요.”

마윅이 사교계에 나오지 않고 산 것은 그렇게 하기로 오래전에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블은 그 이야기는 하지 않고 대신 이렇게 말했다.

“그를 본 적도 없잖습니까?”

여자의 함박웃음이 코웃음으로 바뀌었다.

“다들 공작의 작위를 보는 거죠. 그 점이 굉장히 매력적이잖아요. 은둔하는 공작도 어쨌든 공작부인은 둘 수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군요.”

“결혼 시장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예요.”

여자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덧붙였다.

“어쨌든 상관없어요. 어차피 난 공작에겐 어울리지 않으니까.”

“어째서요?”

사실은 데블에게도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어울리지 않거든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데블이 소리 내어 묻지 않았는데도 여자는 마치 여자들끼리 방에 모여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듯 무심히 대답했다.

“한때는 나도 내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인 줄 알았죠.”

여자는 그에게 대답한다기보다 혼잣말하듯 했다.

“그러다가….”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왜 이렇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어요. 평범한 얼굴에 매력도 없고, 나이는 먹고, 인기 없는 노처녀.”

그런 단어를 늘어놓고는 웃었다.

“나 스스로 남편감을 구할 수 있다고 착각하면서 미적대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날 리 없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체념한 듯한 어조다.

“어머니께서 힘찬 심장박동을 찾고 계시죠.”

“당신이 원하는 건 뭔데요?”

위트의 나이팅게일이 어둠 속에서 계속 울어댔다.

“나한테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그러니까 말해 봐요.”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도 그는 여자의 뒷말을 재촉했다. 저 여자가 어떻든 상관 말고 어서 가봐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여자는 어두운 온실과 복도 너머 눈부신 무도회장을 돌아다보았다.

“다시 저 안에 들어가고 싶어요.”

“다시?”

“나도 한때는….”

말을 하다가 말고는 머리를 흔들더니.

“별로 중요한 얘긴 아니에요. 댁은 이보다 더 중요한 할 일이 있겠죠.”

“사실이 그렇지만, 레이디께서 여기 계시는데 그냥 갈 수는 없지요. 당신 일을 기꺼이 돕고 싶군요.”

여자가 싱긋 웃었다.

“재미있는 분이시군요.”

“그 말에 동의할 사람은 세상천지에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러자 여자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나는 다른 사람들 의견에는 관심 없어요.”

아까 데블이 했던 말 그대로다.

“그 말은 좀 못 믿겠군요.”

그러자 여자가 팔랑팔랑 손을 저었다.

“나도 저들과 함께 다니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는 사교계의 중심에 있었죠. 인기가 아주 많았답니다. 다들 나와 알고 지내고 싶어 했었죠.”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러자 여자는 또 두 손을 활짝 펼쳤다.

“모르겠어요.”

“무엇 때문에 파트너도 없이 벽 앞에 서 있는 월플라워 신세가 됐는지 모른다고요?”

“몰라요.”

여자는 혼란스럽고 서글픈 듯 조용히 말했다.

“나는 벽 근처에도 가지 않았는데, 어느 날 보니까 내가 담쟁이덩굴이 돼 있더군요.”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내가 원하는 건 뭐냐고 물었죠?”

저 여자는 외롭다. 외로움에 관해서는 데블이 잘 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고 싶군요?”

여자는 희망을 잃은 사람처럼 조그맣게 헛웃음을 웃었다.

“다시 돌아갈 순 없어요. 대단한 배우자가 있다면 또 모를까.”

데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공작’인 거고?”

“어머니야 꿈을 꾸실 수 있죠.”

“그러는 본인은?”

“나도… 돌아가고는 싶어요.”

위트의 경고 소리가 또 나자,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나이팅게일이 끈질기게 우네요.”

“짜증이 난 겁니다.”

여자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데블의 설명이 이어지지 않자 화제를 바꿔 물었다.

“이제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줄 건가요?”

“아니요.”

여자는 고개를 한 번 끄덕했다.

“그래요.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나는 단지 거만한 비웃음과 험담에서 벗어나 잠시 조용히 있으려고 나온 것뿐이니까.”

그러고는 발코니 아래쪽의 좀 더 밝은 구역을 가리켰다.

“나는 저리 가서 숨을 만한 곳이 있나 찾아볼 테니, 당신도 원한다면 다시 숨어서 해야 할 일을 하세요.”

그는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대답하지 않았다. 마땅히 해야 할 말 대신 다른 말이 튀어나갈 것만 같아서.

여자가 덧붙였다.

“당신을 보았다고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을게요.”

“실제로 날 보지 못했잖습니까.”

“그러게요. 덕분에 거짓말은 면했네요.”

나이팅게일이 또다시 울었다. 지금 이 순간에 여자와 있는 데블을 위트가 어이없어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럴 때가 아니었다.

여자는 데블에게 예의를 갖춰 우아하게 절을 한 뒤 덧붙였다.

“그럼 어서 가서 비도덕적인 행위를 마저 하시길.”

순간 데블의 입술 주위 근육이 어색하게 꿈틀했다.

미소.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어 본 게 언제였던가. 기억도 없다. 그런데 저 낯선 여인이 마법처럼 그에게서 미소를 끌어냈다.

그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여자가 자리를 떴다. 드레스 자락이 불빛 아래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따라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여자의 머리, 낯빛, 눈빛을 잠깐이라도 보고 싶었으나 애써 참았다.

드레스 색깔조차 제대로 못 봤는데.

지금 바로 쫓아가 확인하면 되겠지만.

“데브.”

정신이 확 들었다. 위트가 발코니로 올라와 어둠 속 그의 옆에 섰다.

“지금.”

위트가 말했다. 계획을 이행해야 할 시간이다. 런던에 발을 들여놓는다면, 한번 훔쳤던 것을 다시 주장하려 든다면, 십여 년 전의 맹세를 깨려 든다면, 데블이 직접 가서 끝장을 내주겠다고 맹세한 자를 손봐 주어야 할 시간이다.

놈을 끝장낼 것이다. 주먹을 쓰진 않겠으나.

“가야 해.”

위트가 나직이 말했다.

“당장.”

데블은 여자가 사라진 곳을 응시한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은 아니야.”